[강연] 제 33회 서울대 자연과학 공개강연_'과학 그리고 인공지능' by 백민경, 황호성, 정하웅, 윤성로, 이현숙, 김유빈 l 서울대학교&카오스재단
인공지능은 이제 단순한 기술적 보조를 넘어 자연과학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핵심적인 동력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에서 진행된 이번 논의는 '과학 그리고 인공지능'이라는 주제 아래, 생명과학부터 천체물리학에 이르기까지 AI가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는 생생한 현장을 조명합니다. 우리는 지금 AI가 인간 지능의 단순한 도구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역할을 완전히 대체하는 주체가 될 것인지라는 중요한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이번 강연은 인공지능이 자연과학 연구의 방법론을 어떻게 혁신하고 있으며, 우리가 그려갈 미래 과학의 지형이 어떤 모습일지를 깊이 있게 탐구합니다. 생명과학 분야에서 인공지능은 생명의 설계도를 직접 쓰는 '창작자'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과거의 생명 설계가 수만 년에 걸친 인위 선택이나 기존 유전자를 뜯어고치는 편집에 의존했다면, 이제는 단백질 구조 예측 AI인 알파폴드나 로제타폴드를 통해 원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생체 분자를 직접 설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50년 동안 생명과학계의 난제로 남아있던 단백질 접힘 문제를 AI가 해결함으로써, 바이러스를 무력화하는 단백질이나 환경 문제를 해결할 플라스틱 분해 효소 설계가 가능해졌습니다. 이는 생명을 관찰의 대상에서 정밀한 설계의 대상으로 변화시킨 획기적인 전환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생명 설계의 지평은 단일 분자를 넘어 세포 전체를 컴퓨터상에 구현하는 가상 세포 시뮬레이션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세포라는 복잡한 시스템을 디지털 트윈으로 구축하면, 신약 개발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동물의 희생을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개인별 특성에 맞춘 정밀한 맞춤형 치료가 가능해집니다. 하지만 이러한 강력한 기술은 암이나 희귀 질환을 극복하는 축복이 될 수도 있는 반면, 잘못된 의도로 사용될 경우 생화학 무기 제조와 같은 재앙이 될 수도 있는 양날의 검입니다. 따라서 기술의 발전 속도에 맞춰 이를 어떤 방향으로 활용할지에 대한 인류의 윤리적 책임과 선택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습니다. 우주의 비밀을 탐구하는 천문학에서도 인공지능은 방대한 항해를 돕는 지능형 가이드 역할을 수행합니다. 인류가 알고 있는 우주의 모습은 전체의 단 5%에 불과하며, 나머지 95%는 암흑 물질과 암흑 에너지라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천문학자들은 루빈 천문대 등에서 쏟아지는 거대한 빅데이터를 처리하고, 은하의 분포를 통해 보이지 않는 암흑 물질의 지도를 그리는 데 AI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물리 법칙을 바탕으로 구현된 가상 우주 시뮬레이션과 인공지능의 학습 능력이 결합하면서, 인류는 우주가 어떻게 탄생하고 진화해 왔는지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에 대해 과학적인 답을 더욱 정교하게 찾아가고 있습니다. 최근 노벨 물리학상이 인공지능 연구자들에게 수여된 사건은 물리와 정보 과학의 경계가 허물어졌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홉필드 네트워크나 볼츠만 머신과 같은 초기 AI 모델들은 통계 물리학의 에너지 모델과 전자의 스핀 개념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했습니다. 이는 '정보' 자체가 물리학의 핵심적인 탐구 대상이 되었음을 선언한 것과 같습니다. 또한 현대의 물리학자들은 새들의 군무와 같은 복잡계 현상을 연구할 때 AI를 동료 연구자로 활용하여 새로운 물리 법칙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AI는 이제 단순한 계산 도구를 넘어, 복잡한 데이터 이면에 숨겨진 자연의 패턴을 찾아내는 강력한 학문적 파트너로서 기능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의 급격한 발전 속에서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가치에 대한 고민도 깊어지고 있습니다. 챗GPT와 같은 생성형 AI가 지식 전달과 데이터 처리를 완벽하게 수행하더라도, 그 지식을 바탕으로 깊은 통찰을 얻고 윤리적 균형을 유지하며 결정을 내리는 '지혜'는 여전히 인간의 영역으로 남아있습니다. 교육 현장에서도 단순한 지식 습득이나 기술적 활용법보다는 수학과 통계학 등 학문의 근본적인 원리로 돌아가는 태도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결국 인공지능 시대에 우리가 갖춰야 할 핵심 역량은 AI가 제시하는 답을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능력이 아니라, 현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세상에 더 나은 질문을 던지는 힘에 있습니다. 과학은 결국 인간과 자연이 나누는 끊임없는 대화이며, 인공지능은 그 대화를 더욱 풍성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주는 혁신적인 매개체입니다. 우리가 마주한 AI 기반의 과학 혁명은 인류의 지능을 확장하고 미지의 영역을 탐구할 용기를 주지만, 동시에 기술을 다루는 사람의 가치관과 책임감을 엄중히 요구합니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정교하게 발전하더라도, 그 도구를 활용해 어떤 미래를 설계하고 어떤 길을 걸어갈지 결정하는 주체는 결국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자연과학의 기초가 되는 끈기 있는 질문과 인공지능의 놀라운 계산 능력이 조화를 이룰 때, 우리는 비로소 삶과 우주의 근원적인 비밀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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