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요약
복잡계 물리학은 우리 일상과 동떨어진 학문처럼 보이지만, 사실 세포나 박테리아, 인간 사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구성원이 모여 상호작용하는 모든 곳에 존재합니다. 2021년 노벨 물리학상은 이러한 복잡계의 본질을 규명한 학자들에게 수여되었습니다. 특히 조르조 파리시 교수는 무질서한 시스템 속에 숨겨진 패턴을 발견함으로써, 복잡계 물리학이 정립된 학문으로 인정받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물리 법칙을 넘어 자연의 복잡성을 이해하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물리학의 전통적인 접근 방식은 물질의 가장 근본적인 단위를 파고드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필립 앤더슨이 주창한 '많으면 다르다(More is different)'라는 명제는 개별 입자의 법칙을 안다고 해서 전체 시스템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음을 시사합니다. 물 분자 사이의 미시적 법칙은 동일하지만, 온도가 변함에 따라 물이 얼음으로 변하는 거시적 상전이가 나타나는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수많은 구성 요소가 모였을 때 비로소 나타나는 새로운 물리적 규칙들을 이해하는 것이 복잡계 연구의 핵심입니다.
상전이를 이해하는 현대 물리학의 핵심 도구는 '대칭성 깨짐'입니다. 예를 들어 액체 상태에서는 공간의 어느 방향으로든 평행 이동해도 에너지가 변하지 않는 높은 대칭성을 가집니다. 그러나 온도가 낮아져 고체가 되면 입자들이 특정 격자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서 대칭성이 낮은 상태로 변합니다. 자성체 역시 고온에서는 무작위 방향을 향하던 스핀들이 저온에서 특정 방향을 택하며 자성을 띠게 됩니다. 이러한 대칭성 깨짐은 무질서한 상태에서 질서가 형성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중요한 원리입니다.
파리시 교수가 연구한 '스핀 유리'는 자성체에 불순물이 섞여 무질서가 극대화된 시스템입니다. 여기서는 스핀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거리에 따라 양수와 음수를 오가며 복잡하게 얽힙니다. 이로 인해 스핀들이 어느 방향을 향해야 에너지가 낮아질지 결정하지 못하는 '쩔쩔맴(Frustration)' 현상이 발생합니다. 친구와 원수가 뒤섞인 인간관계에서 누구 편을 들지 고민하는 상황처럼, 스핀들도 최적의 상태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게 됩니다. 이러한 무질서와 쩔쩔맴(Frustration)이 스핀 유리의 독특한 복잡성을 만들어냅니다.
복잡한 스핀 유리 시스템을 수학적으로 풀기 위해 물리학자들은 '복제'라는 기발한 방법을 도입했습니다. 시스템의 복제본들을 여러 개 만들어 계산한 뒤, 복제본의 수를 0으로 보내는 극한을 취하는 방식입니다. 초기에는 모든 복제본이 동일하다는 '복제 대칭성'을 가정했으나, 이는 저온에서 엔트로피가 음수가 되는 등 물리적 오류를 낳았습니다. 이는 기존의 단순한 대칭성 가정으로는 무질서한 시스템의 복잡한 바닥 상태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음을 의미하며,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이었습니다.
조르조 파리시 교수는 복제본들 사이의 대칭이 깨져야 한다는 '복제 대칭성 깨짐'이라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했습니다. 그는 행렬을 무한히 쪼개는 수학적 기법을 통해 스핀 유리가 단 하나의 안정된 상태가 아닌, 무수히 많은 에너지 골짜기를 가진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이 골짜기들은 서로 닮은 정도에 따라 가계도와 같은 계층적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는 무질서한 시스템이 단순히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 내부에 정교하고 복잡한 수학적 질서가 숨어 있음을 증명한 놀라운 발견이었습니다.
현대 물리학의 많은 부분은 우리의 직관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깜깜한 방에서 무언가를 비춰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등불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수학입니다.
파리시의 방법론은 물리학을 넘어 최적화 문제, 신경망 모델링, 단백질 접힘 등 다양한 분야에 응용되고 있습니다. 수많은 도시를 방문하는 최단 경로를 찾는 외판원 문제나 뇌의 뉴런 작용을 이해하는 과정에서도 이 복잡계 이론이 핵심적인 도구로 쓰입니다. 이는 직관으로 이해하기 힘든 복잡한 현상을 수학이라는 등불을 통해 명확히 비춰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복잡계 물리학은 무질서해 보이는 세상 속에서 보이지 않는 패턴을 찾아내어 현대 과학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