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요약
루이스 캐럴의 소설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는 앨리스가 붉은 여왕과 함께 숨이 가쁘도록 달리는 유명한 장면이 나옵니다. 앨리스는 아무리 빨리 달려도 주변 경치가 전혀 변하지 않는 것에 의문을 갖지만, 여왕은 그저 그 자리에 머물기 위해서라도 온 힘을 다해 뛰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미국의 생물학자 리 밴 베일런은 이 동화적 상상력을 과학의 영역으로 가져와 '붉은 여왕 가설'을 제안했습니다. 이는 생태계 내의 생물들이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주변 환경이나 경쟁자보다 끊임없이 더 빨리 진화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밤하늘에서 펼쳐지는 박쥐와 밤나방의 치열한 공중전은 이러한 진화적 경쟁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박쥐는 정교한 초음파 시스템을 이용해 어둠 속에서도 나방의 위치를 파악하고 사냥하는 전술을 구사합니다. 이에 맞서 밤나방은 박쥐의 초음파를 감지하는 청각 기관을 발달시켰고, 비행 궤적을 불규칙하게 바꾸어 추적을 따돌리는 방어 기제를 진화시켰습니다. 박쥐 또한 나방이 듣지 못하는 주파수를 사용하거나 소리의 세기를 낮추는 스텔스 공격 전술로 대응하며, 양측은 생존을 위해 쉼 없이 전술을 업그레이드하고 있습니다.
진화적인 시간 동안 포식자와 피식자가 모두 방법을 개선한다면, 비록 전술은 바뀔지 몰라도 각자의 상대적인 성공은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붉은 여왕 가설을 과학적으로 입증하기 위해서는 전술의 고도화에도 불구하고 개체 간의 상대적인 생존 확률이 장기적으로 일정하게 유지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즉, 현재의 포식자가 과거의 피식자를 만났을 때는 압도적인 사냥 성공률을 보여야 하지만, 자신과 함께 진화한 동시대의 피식자를 상대로는 이전과 다름없는 수준을 기록해야 합니다. 하지만 서로 다른 시대의 생물들을 실제로 한자리에 모아 경쟁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에, 2007년 호수 침전물을 활용한 기발한 연구가 등장하기 전까지 이 가설은 증명하기 힘든 난제로 남아있었습니다.
연구팀은 물벼룩인 '다프니아 마그나'와 그 몸속에 사는 기생 세균의 관계에 주목하여 실험을 설계했습니다. 호수 바닥의 침전물은 시간에 따라 층별로 쌓이기 때문에, 깊은 곳에서 발견된 개체일수록 더 먼 과거에 살았던 생물임을 뜻합니다. 연구진은 각기 다른 깊이의 지층에서 휴면 상태에 있던 물벼룩과 세균을 채집하여 다시 활동할 수 있게 부활시켰습니다. 이를 통해 서로 다른 시간대에 존재했던 숙주와 기생자를 실험실 환경에서 동시에 교차 노출시키는 것이 가능해졌고, 세대 간 진화의 선후 관계에 따른 상호작용을 정밀하게 분석할 수 있었습니다.
실험 결과, 현재의 기생 세균은 자신과 함께 살아온 숙주보다 과거의 숙주를 감염시키는 데 훨씬 뛰어난 성공률을 보였습니다. 이는 기생자가 숙주의 옛 방어 체계를 극복하며 끊임없이 진화해 왔음을 뜻하는 명확한 증거입니다. 반면 숙주 역시 기생자의 변화에 발맞춰 대응 체계를 개선해 왔기에, 동시대 개체들 간의 상대적인 감염률은 긴 세월이 흘러도 큰 변화 없이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결국 모든 생명체는 현재의 성공을 유지하기 위해 매 순간 변화해야 하며, 생존이란 멈추지 않는 진화의 전진 속에 있다는 진리가 이 연구를 통해 증명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