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 유전과 환경: 무엇이 우리를 만드는가? _ by 김영준 ㅣ 2022 가을 카오스강연 '진화' 7강 | 7강
생명과학의 역사는 우리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탐구하는 긴 여정이었습니다. 멘델의 유전 법칙에서 시작해 DNA의 이중나선 구조가 밝혀지고, 마침내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통해 생명의 설계도를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설계도를 모두 안다고 해서 생명의 모든 신비가 풀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동차의 부품 목록을 안다고 해서 그 자동차가 어떻게 도로를 달리고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 전부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유전자는 고정된 정보이지만,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발현되는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믿음은 여러 현상 앞에서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유전 정보가 완벽히 동일한 일란성 쌍둥이가 성장하면서 외모와 성격, 질병의 양상이 달라지는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또한 우리 몸의 근육 세포와 신경 세포는 모두 같은 DNA를 가지고 있지만, 그 형태와 기능은 완전히 다릅니다. 이는 동일한 설계도 안에서도 특정 부분은 활성화되고 다른 부분은 잠겨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바로 유전자 너머의 조절 시스템을 연구하는 후성유전학입니다. 후성유전학은 DNA 염기서열 자체를 바꾸지 않으면서 유전자의 스위치를 켜고 끄는 메커니즘을 다룹니다. 우리 몸의 핵 안에는 거대한 DNA가 실타래처럼 감겨 있는데, 이 실타래를 구성하는 히스톤 단백질에 표식을 남기거나 DNA 자체에 메틸기를 붙여 유전자의 접근성을 조절합니다. 마치 도서관의 수많은 책 중에서 어떤 책은 대출 가능하게 열어두고, 어떤 책은 창고에 깊숙이 넣어두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정교한 조절 시스템 덕분에 우리 몸의 세포들은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며 생명 활동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유전자 스위치가 우리가 처한 환경과 생활 습관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을 먹는지, 어떤 스트레스를 받는지에 따라 유전자의 발현 양상이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임신 중인 쥐가 섭취한 영양분은 새끼의 털 색깔과 비만 여부를 결정짓는 후성유전적 표식을 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유전자가 단순히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고정된 운명이 아니라,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는 유연한 시스템임을 시사하며 우리 삶의 태도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집니다. 노화와 질병 역시 후성유전학적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됩니다. 나이가 들수록 세포 내의 후성유전적 장벽이 무너지면서 유전자 발현의 이질성이 커지는데, 이를 '후성유전적 표류'라고 부릅니다. 암세포의 경우 유전자 돌연변이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유전자 스위치가 잘못 작동하여 발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후성유전적 변화는 가역적이라는 희망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잘못 켜진 스위치를 다시 끄거나 잠긴 유전자를 깨우는 방식으로 질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입니다. 후성유전학은 개체의 생애를 넘어 진화의 영역으로까지 논의를 확장합니다. 사자와 호랑이의 교배종인 라이거와 타이곤이 서로 다른 체구와 특성을 갖는 이유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 각인 때문입니다. 특정 환경에서 획득한 후성유전적 형질이 다음 세대로 전달될 수 있다는 증거들이 발견되면서, 진화는 수만 년에 걸친 돌연변이의 축적뿐만 아니라 후성유전적 적응을 통해서도 일어날 수 있음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이는 생명체가 환경에 적응하는 방식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역동적임을 보여줍니다. 결국 후성유전학은 우리에게 '운명은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DNA라는 설계도는 바꿀 수 없지만, 그 설계도를 어떻게 읽고 활용할지는 우리의 선택과 환경에 달려 있습니다. 유전과 환경은 서로 대립하는 요소가 아니라, 생명이라는 거대한 오케스트라를 함께 연주하는 파트너입니다. 앞으로 후성유전체에 대한 연구가 깊어질수록 우리는 생명의 기원과 진화의 과정을 더 명확히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인류가 자신의 건강과 미래를 스스로 설계해 나가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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