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 좋은 균, 나쁜 균, 이상한 균 _ 류충민 ㅣ 2022 카오스강연 '생명행성' 1강 | 1강
식물은 움직일 수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안고 수억 년을 생존해 왔습니다. 그 비결은 미생물과의 긴밀한 상호작용에 있습니다. 린 마굴리스가 제안한 '홀로바이옴' 개념은 식물과 미생물을 별개의 존재가 아닌 하나의 연합체로 봅니다. 우리 세포 속 미토콘드리아나 엽록체도 과거에는 독립된 미생물이었으나 공생을 통해 세포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식물은 보이지 않는 수많은 세균, 진균과 협력하며 지구 생태계의 당당한 주인공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미생물은 현미경으로만 볼 수 있을 정도로 작지만, 지구상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섭씨 수백 도의 열수구나 산소가 없는 극한 환경에서도 그들은 삶을 이어갑니다. 흔히 미생물이라고 하면 병을 일으키는 나쁜 존재로만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병원균은 전체의 0.0001%도 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미생물은 죽은 유기물을 분해하여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분해자 역할을 수행합니다. 이들이 없다면 지구의 생태 순환은 멈추고 말 것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미생물은 거대한 변화를 이끌어왔습니다. 19세기 아일랜드 대기근은 감자역병균이라는 작은 진균에서 시작되어 수많은 인명 피해와 대규모 이주를 초래했습니다. 이후 인류는 비료와 농약을 개발하며 '녹색 혁명'을 이루어 기아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농약에 대한 내성 문제가 대두되면서, 화학적 방제 대신 식물 본연의 면역력을 높이고 미생물 생태계를 활용하는 친환경적인 연구가 더욱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식물의 뿌리 주변인 근권은 미생물들에게는 거대한 먹이 창고와 같습니다. 식물은 광합성 산물의 약 30%를 뿌리를 통해 토양으로 내보내며 미생물을 유인합니다. 미국 워싱턴주의 밀밭 사례를 보면, 특정 병해가 창궐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억제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이는 뿌리 주변에 병원균을 억제하는 유익균인 '슈도모나스'가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식물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특정 미생물을 선택하고 그들과 공생하는 지혜를 발휘합니다. 최근 과학자들은 단일 미생물이 아닌 미생물 공동체, 즉 네트워크의 힘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토마토 풋마름병 연구에 따르면, 건강한 식물 곁에는 병원균이 존재하더라도 이를 억제하는 핵심 미생물들이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연예인들의 인맥 지도처럼 미생물 사이에도 중심 역할을 하는 '허브 균주'들이 존재합니다. 여러 유익균을 적절히 조합했을 때 단일 균주보다 훨씬 강력한 방어 효과를 나타낸다는 사실은 생태계의 다양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시사합니다. 병원균 또한 식물을 공격하기 위해 정교한 전략을 구사합니다. 세균은 식물의 호흡 통로인 기공을 강제로 열기 위해 특수한 물질을 분비하며, 세포벽을 뚫고 폭탄과 같은 단백질을 주입하는 '분자 주사기'를 사용합니다. 특히 이들은 '정족수 인식'이라는 소통 방식을 통해 동료의 수가 충분히 모일 때까지 숨어 있다가, 일제히 독소를 뿜어내어 식물의 면역 체계를 무너뜨립니다. 식물과 미생물은 수억 년 동안 이처럼 치열한 창과 방패의 전쟁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식물은 위급 상황에서 일종의 SNS와 같은 신호 체계를 가동합니다. 온실가루이 같은 해충이 잎을 공격하면, 식물은 체관을 통해 뿌리로 위험 신호를 보냅니다. 이 신호를 받은 뿌리는 평소보다 더 크게 자라나며 유익균인 슈도모나스를 대거 불러모읍니다. 놀랍게도 이렇게 모인 유익균은 식물의 면역력을 높일 뿐만 아니라 해충을 직접 공격하기도 합니다. 움직일 수 없는 식물이지만, 보이지 않는 미생물 군대를 동원하여 자신을 지키는 고도의 생존 전략을 펼치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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