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저자강연] 김범준 교수의 관계의 과학
통계물리학은 대상의 크기가 아니라 '많음'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고전역학이나 양자역학이 대상의 크기에 따라 구분된다면, 통계물리학은 입자가 얼마나 많이 모여 있는지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티끌 모아 태산을 이해한다'는 말처럼, 통계물리학자는 미시적인 개별 정보에서 출발하여 거시적인 통계적 성상을 파악하고자 합니다. 이는 단순히 수치를 계산하는 통계학과는 다르며, 수많은 입자가 모였을 때 전체가 보여주는 거시적이고 통계적인 특성인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물리학의 전통적인 분야입니다. 복잡계는 수많은 구성 요소가 서로 강하게 상호작용하며, 부분이 갖지 못한 새로운 특성을 전체가 보여주는 시스템을 의미합니다. 이를 '창발 현상'이라고 부릅니다. 물 분자 하나에서는 얼음의 딱딱함을 느낄 수 없고, 원자 하나를 현미경으로 본다고 해서 생명력을 발견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복잡계 연구의 핵심은 '함께하면 달라진다'는 원리에 있습니다. 구성 요소들이 모여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나타나는 새로운 성질을 탐구하는 것이 복잡계 과학의 묘미입니다. '1 더하기 1은 2'라는 문장에서 '1'이라는 구성 요소만큼 중요한 것이 바로 '더하기'라는 관계입니다. 구성 요소에 대한 정보만으로는 전체의 모습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 요소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고 소통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물리학에서는 이를 상호작용이라 부르며, 통계물리학은 결국 이러한 '관계의 과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도시의 인구가 늘어날 때 부유함이나 창의성이 단순 비례보다 더 빠르게 증가하는 이유도 바로 구성원들 사이의 촘촘한 관계와 소통의 힘에 있습니다. 도시는 인구가 두 배로 늘어날 때 재산이나 특허의 양이 2.2배로 증가하는 놀라운 효율성을 보여줍니다. 반면 하수도나 주차장 같은 도시 기반 시설은 1.8배만 늘어나도 충분합니다. 이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 소통하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혼자서 연구하는 '면벽 수도'의 세상보다, 사람들이 연결되어 상호작용하는 도시가 훨씬 더 창의적이고 경제적인 성과를 내는 것은 관계가 만들어낸 복잡계의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인구가 밀집될수록 도시는 더 효율적이고 창의적인 공간으로 진화합니다. '저절로 다가서는 임계성(SOC)'은 외부에서 조건을 맞추지 않아도 시스템이 스스로 임계 상태에 도달하는 현상입니다. 모래알을 하나씩 떨어뜨리면 모래 언덕은 스스로 무너지고 쌓이기를 반복하며 특정한 경사도를 유지합니다. 산불 역시 나무의 밀도가 너무 높으면 번개에 의해 크게 타버리고, 낮으면 불이 번져나가지 못하며 스스로 균형을 찾아갑니다. 이러한 현상은 자연이 외부의 간섭 없이도 스스로를 조절하며 특정한 질서와 임계 상태로 나아가는 신비로운 과정을 잘 보여줍니다. 임계 상태에 있는 시스템은 '척도가 없다'는 특징을 가집니다. 사람의 키는 평균 근처에 모여 있는 정규 분포를 따르지만, 소득이나 산불의 규모, 지진의 에너지는 '멱함수' 꼴의 척도 없는 분포를 따릅니다. 이는 평균보다 수만 배 큰 사건이 언제든 일어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거대한 산불이나 주가 폭락의 원인을 특정 나무나 사건 하나에서 찾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특정한 한 요인이 아니라, 전체 시스템의 연결 구조와 상호작용의 패턴이 그 격변의 규모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지진이나 주식 시장은 과거의 데이터로 미래를 정확히 맞히는 '동역학적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관성이나 주기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통계적인 예측은 가능합니다. 특정 규모의 지진이 몇 년에 한 번꼴로 발생하는지 파악함으로써 내진 설계의 기준을 세우는 식입니다. 과학적 사고와 데이터에 기반한 합리적인 판단이 우리 사회에 더 익숙해질수록, 우리는 예측 불가능한 재난에 더 현명하게 대비할 수 있습니다. 함께하는 관계의 힘을 이해할 때 우리 사회는 더 나은 결정을 내리는 이성적인 공동체로 거듭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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